감리교회 정체성과 에큐메니즘: 기독교 다원주의를 향하여
By Chanseok Lee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시대에 감리교가 다듬어야 하는 에큐메니즘을 ‘사랑에 근거한 기독교 다원주의’로 수렴하고 싶다. 기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을까? 존 웨슬리를 꼼꼼하게 읽어가노라면 존 웨슬리는 기독교 다원주의자로 읽힐 것이다. 에큐메니즘과 에큐메니컬 운동을 집중하여 읽고 넓은 마음으로 조망하여 보면, 기독교 다원주의로 보이게 된다. 이 시대의 감리교도들이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 다원주의’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실한 머슴들이 되기를 소망하여 본다.”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어도 같은 식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일치된 의견은 아니어도 일치된 마음(one heart)을 나눌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i]
본 글의 첫 번째 지향점은 탈-현대(post-modern) 사회에 적합한 감리교 신학의 정체성은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가이며, 두 번째 지향점은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의 감리교 정체성은 에큐메니즘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감리교의 정체성! 난해한 문제로 다가온다. 감리교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관한 해법은 먼저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로부터 찾아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존 웨슬리는 명료한 설명을 선물하지 않았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특징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기독교의 공통적인 근본 원리들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와 내 생각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기독교의 공통 원리들—내가 가르치는바 명백한 옛 기독교—이외의 어떤 것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며, 모든 다른 구별되는 특징들을 부인하고 혐오한다는 사실을 당신과 모든 사람이 알기를 하나님께 바란다.”[ii] 웨슬리는 감리교도들이 다른 교파의 기독교인들과 독특하게 구별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감리교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일반적으로 정체성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구성해 나가야 한다. 나의 정체성은 있는 것, 주어진 것으로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만들어나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소년 시절 나의 정체성과 성인이 된 후 나의 정체성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의 정체성은 이미 결정되어 주어진 요소보다는 다양한 상황에 적합하게 내가 구성하여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리교회의 정체성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이 성서에서 복음을 찾아내고 그 복음을 시대와 상황에 적합하게 새롭게 해석하고 구성하여 나가듯이, 감리교회의 정체성도 존 웨슬리로부터 실마리를 찾고 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해 나가야 한다.
존 웨슬리에 따르면 감리교도(Methodist)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음을 믿는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구별되며, 성경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 유일하고 충분한 규범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점에서 천주교 신자와 구별되며, 그리스도가 영원하고 지고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점에서 아리우스주의자(Arians)들과 구별된다. 또한 존 웨슬리는 감리교의 신앙을 어떤 특정 단어나 어구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감리교도의 특징을 어떤 종류의 의견이나 언어에 두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본다.[iii] 그러면서도 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메도디스트의 특징은 무엇인가? 당신은 메도디스트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메도디스트는 자기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하여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널리 부어진 사람이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그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의 기쁨이요 영혼의 소원이다…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전체이시여! 당신은 나의 마음의 힘이시며 영원히 나의 몸입니다! 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iv]
감리교도의 특징에 관한 존 웨슬리의 설명에서 도드라지는 부분은 ‘성령에 의하여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널리 부어진 사람이며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부분이다. 존 웨슬리는 종교 개혁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이기에 감리교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루터와 같이 ‘믿음’을 강조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단어는 생략되고 ‘사랑’이 반복하여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율법 II>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이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이 주신 믿음일지라도 결국은 ‘사랑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선언해야 합니다… 믿음이 비록 영광스럽고 명예스러운 것이긴 해도 그것이 계명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사랑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 쇠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v]
존 웨슬리의 신학에서 믿음은 칭의(justification)에 상응하고, 사랑은 성화(sanctification)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존 웨슬리는 의(義)롭다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완전 성화를 위해서는 사랑(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시대 감리교 신학의 정체성은 ‘사랑’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중심으로 다듬어 나가야 한다.
정체성은 이미 있는 것으로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구성해야 하는 것이라면, 다문화 다인종 시대인 이 시대에 어울리는 감리교의 정체성은 ‘사랑’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 시대 감리교 신학이 굵은 밑줄을 그어야 하는 점은 믿음이 그냥 믿음이 아니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라디아서 5:6)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개인적 성화, 사회적 성화, 우주적 성화를 완성하는 일이다. 이 시대 감리교 신학의 정체성은 ‘사랑’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중심으로 다듬어 나가야 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같은 하나님, 하나의 세례, 동일한 성서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교파 간의 갈등과 충돌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즘의 정체성을 일반적으로 ‘교회 일치 운동’ 또는 ‘교회 연합 운동’으로 성격화 한다. 그러나 일치/연합 운동은 ‘획일화’라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전 세계적인 에큐메니컬 단체인 WCC(World Council of Church)는 교파 통합 또는 하나의 초대형 교회(Super Church)를 만들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엄밀히 말한다면 에큐메니즘은 ‘일치’ ‘획일화’를 지향하지 않고 ‘조화’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컬 운동은 다양한 예배의 형식이나 교리를 하나의 형식이나 하나의 교리로 통일하려고 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간의 조화(harmony)를 창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즘의 정체성은 ‘일치 운동’이라기보다는 ‘조화 운동’으로 성격화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대표하는 WCC 총회들을 주의 깊게 보면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조화, 평화와 정의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 제일 세계와 제삼 세계의 조화를 모색하고 있다.[vi]
존 웨슬리는 일찍이 에큐메니즘의 정신을 설교하였던 에큐메니컬 운동의 선구자이었다. 그는 종교(religion)와 의견(opinion)을 분리하며, 의견이 종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정통 교리, 바른 의견이 종교라고 꿈꾸지 말라고 당부한다. 정통 교리 혹은 올바른 의견이 종교의 어느 부분이 되고자 한다면 종교의 매우 빈약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존 웨슬리는 내 믿음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한 법칙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예배 형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일치의 정신’(Catholic Spirit)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속한 국교회의 예배 형식이 역사적이고 사도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을 다른 사람이 따라야 할 규칙으로 제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연합해야 할 상대에게 저의 교파, 그것의 치리 제도, 성직 제도, 기도 형태, 성찬 방식, 세례 자격과 방식 같은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렵니다. 세례나 성찬을 인정하는지의 여부조차도 말입니다.”[vii]
존 웨슬리 자신은 영국 국교회의 사제이기 때문에 국교회의 예배 형식이 가장 사도적이라고 믿지만, 다른 교파의 모든 제도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고 ‘사랑’으로 다른 교파와 손을 잡으려고 한다. 마치 예후가 여호나답의 손을 잡은 것처럼. 존 웨슬리는 무엇에 근거하여 교리의 차이, 믿음의 차이, 예배 형식의 차이를 인정하려고 하는가? 인간의 유한성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유한성으로 인하여 모든 일을 동일하게 인식할 수 없고 종교 생활에서도 일정하지 않은 생각을 가진다. 존 웨슬리는 ‘당신은 당신의 의견을 따르고 나는 내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고, 당신이 내 의견에 가까워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내가 당신의 의견에 가까워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각 교파의 다양성을 존중한다.[viii] 존 웨슬리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의 성서로 같은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와 예배 형식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다양한 ‘교리’와 ‘예배 형식’은 종교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유한성, 한계성으로부터 우러나온 ‘의견’이다.
존 웨슬리는 “분열에 대하여”(On Schism)라는 설교에서 분열의 원인을 사랑의 결핍으로 분석하면서 사랑으로 연합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본질은 우리 모두를 연합하게 하는 것이며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지속하게 될 때 그 어느 것도 사랑으로 매여 있는 관계를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사랑이 식어가게 될 때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분리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형제들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분리를 위한 핑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핍은 항상 이런 것에 대한 실제적인 원인입니다.”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감리교인들에게 존 웨슬리가 요구하는 첫 번째 핵심어는 ‘사랑’이고 두 번째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또한 존 웨슬리와 이 시대의 에큐메니즘을 접속하여 본다면, ‘다양성 안에서의 조화’에 굵은 밑줄을 그어야 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다양한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예수가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을 선포하신다면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아마도 ‘월드컵’과 ‘올림픽’을 메타포(metaphor)로 사용하였을 것 같고, 하나님 나라는 월드컵 대회라기보다는 ‘올림픽 대회’라고 말씀하셨으리라 추측해 본다. 월드컵과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월드컵은 단일 종목의 축제라면 올림픽은 다양한 종목들의 축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월드컵은 획일화로 규정할 수 있다면, 올림픽은 다양화 또는 다양성의 조화로 규정할 수 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추측해본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이 향유하고 있는 올림픽 축제와 같다.”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점은 획일화이다. 시날 평지의 주인공들은 흩어짐(다양성)을 면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다. 다양하게 흩어지고 분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뜻이었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의 주인공들을 해체하고 분산시키고 흩으셔야만 했다. 이 사건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하다.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추구하고 요구하신다는 점이다.
존 웨슬리가 명료하게 지적하였듯이, 인간은 한계성을 지닌 존재이므로 다양한 교리와 다양한 예배 형식은 인간의 유한성에서 오는 결과물들이다. 이 유한성에 기반한 것들을 근거로 다른 교파, 교리들을 정죄하는 행위는 ‘사람됨’을 포기하며 신(神)에게 도전하는 행위로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다. 다양성의 시대에 감리교도들은 존 웨슬리와 같이 교리적 다양성과 교파적 다양성을 공손하게 수용하면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감리교가 프로테스탄트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행위’나 ‘공적’보다는 ‘믿음’만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야고보서 2:26)으로 죽은 것이며, 본회퍼가 지적하였듯이 ‘값싼 은혜’(cheap grace)이다. 웨슬리와 같이 ‘사랑’을 강조하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밑줄을 그어야만 한다.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시대에 감리교가 다듬어야 하는 에큐메니즘을 ‘사랑에 근거한 기독교 다원주의’로 수렴하고 싶다. 기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을까? 존 웨슬리를 꼼꼼하게 읽어가노라면 존 웨슬리는 기독교 다원주의자로 읽힐 것이다. 에큐메니즘과 에큐메니컬 운동을 집중하여 읽고 넓은 마음으로 조망하여 보면, 기독교 다원주의로 보이게 된다. 이 시대의 감리교도들이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 다원주의’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실한 머슴들이 되기를 소망하여 본다.
[i] 아드 폰테스 웨슬리 엮음, 그 길: 웨슬리 표준설교 읽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9), 405.
[ii] 한국웨슬리학회 편역, 존 웨슬리 논문집 1 (서울: 한국웨슬리학회, 2009), 65.
[v] 아드 폰테스 웨슬리 엮음, 그 길: 웨슬리 표준설교 읽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9), 370-371.
[vi] WCC를 조화 운동으로 성격화 하는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조. 이찬석, 글로컬 시대의 기독교신학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3), 232-257.
[vii] 아드 폰테스 웨슬리 엮음, 그 길: 웨슬리 표준설교 읽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9).
[viii] 이찬석, “존 웨슬리와 에큐메니즘: 그리스도교 다원주의를 향하여” 글로컬 시대의 기독교신학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3), 269-270.
이찬석 교수 Ph.D
협성대학교 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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