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의 시대, 공생을 생각하는 교회 (1)
By Il Joon Park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종교의 의미,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의미란 무엇일까,’ ‘교회란 무엇이어야 할까,’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할까’를 묻게 된다. 물론 인생과 문명 속에서 재난들은 계속 있었지만, 팬데믹이 다른 재난과 다른 것은 ‘세계의 종말’을 고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계의 종말은 종말론적이거나 묵시적인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재난은 범위가 넓다고 해도 근원적으로 ‘국지적’이다. 즉 전 세계가 모두 재난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왜 그들에게 혹은 우리에게 이런 재난이 일어났는지를 묻고 고민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런데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은 전 세계적인 문제이고, 이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다. 현재 전 세계는 방역 때문에 국가 간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우리가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하면서 알아 왔던 ‘세계’의 종말이다. 사실 질병의 발발보다 우리가 알아 왔던 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심리적 충격이 팬데믹 이후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이 심리적 여진 앞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공멸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우리가 친숙하게 알아 왔던 세계의 종말은 사실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다. 소위 근대라는 시대의 융기 이후 우리가 살아왔던 총체적 방식의 종말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종말’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 모두가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경고를 울리고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바뀌지 않는 현실, 그 앞에서 모두가 무기력을 느낀다. 지구 온난화와 생태계 위기는 지금 팬데믹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재난의 또 다른 이름이자 모습이다. 우리는 왜 이 공멸의 위기 앞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서로를 비난하며 분노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데 열중하고 있을까? 그 ‘종말’이라는 위기가 눈에 당장 안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안 보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표가 그것을 가리키는 ‘대상’을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은 “초객체”(hyperobject)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 ‘대상’(對象)은 스스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객체’(客體)다. 하지만 너무나 거대해서(hyper-) 우리의 눈과 경험으로는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 그 초객체는 자기 모습들을 담지해 전달하지만, 인간은 대체로 그런 객체들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인지적 무능력은 결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명에 ‘무기력’과 ‘무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무능의 시대 (the age of impotence)
프랑코 베라르디는 우리 시대를 “무능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경쟁 구조가 체화된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는 진정한 승자 없이 모두를 패자로 만들어버리는 무한의 쳇바퀴다. 이 무능의 시대는 그래서 헛된 망상의 시대이기도 하다. 리처드 도킨스의 ‘망상’(delusion)에 대한 유명한 정의는 바로 ‘없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망상의 주요 증상이다. 도킨스가 이 ‘망상’에 대한 정의를 도입하는 이유는 우리 시대가 ‘신 망상’(the god delusion)에 빠져 있다는 경고와 비판을 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가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 시대 거의 모든 가치의 지표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한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공정성의 패러다임을 마치 정의의 지표인 듯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 자본주의적 체제하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진정한 ‘승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호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공정한 경쟁 자체가 가능할까? 우리의 삶 속에서 운영되는 무한 경쟁은 ‘연습’이 아니다. 한번 경쟁에서 탈락하면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안은 없다. 산업 자본주의 시절부터 진화론의 이데올로기적 응용으로 인해, 우리는 생명의 세계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기본적 메커니즘으로 하는 세계라고 세뇌되어왔던 탓이다. 심지어 ‘인간’이라는 개체조차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포함하여 더불어 사는 ‘공생하는 집단체’라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하면서까지 말이다.
사실 그 어떤 생명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개체’라는 유기체 단위의 설정은 경험적이고 사실적이고 명백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극히 추상적이지만, 근대적 사유를 구성하기에 가장 기초적인 개념이었다. 유기체적 존재 단위의 기초인 세포조차 서로 별도로 존재했을 DNA, RNA, 단백질의 시스템들이 모여 공생의 구조를 이룬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유기체의 세포는 DNA조차 하나의 획일적인 시스템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포의 에너지 공장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는 세포핵 내에 보관된 DNA와는 다른 계열의 DNA를 자체적으로 갖고 있고, 이는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이 된다. 100%의 세포 복제가 불가능한 생물학적 이유다. 그렇게 모든 생명의 단위는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공생의 얽힘(entanglement) 구조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 얽힘을 총체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우리는 편의상 그 얽힘의 단위를 목적에 따라 구별해서 분별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이렇게 얽혀있는 것이라면,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적자(the fittest)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약육강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거대한 생명의 망에 속해있고, 그 공생의 구조는 낭만적으로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공생이란 포식자가 먹이를 잡아먹는 시스템까지도 포괄하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약한 개체들끼리 모여 생존을 위해 협동하면서, 포식자를 물리치는 것도 공생의 다양한 삶의 양식 속에 포함된다.
우리의 경쟁 시스템은 망상을 창조한다.
중세적 유산으로부터 근대적 사유 구조로 삶의 양식이 이전하던 다윈 시대의 ‘적자’란 ‘구원이 예정된 선택된 자’를 가리키는데, 당대의 사회 구조하에서 이는 부유한 지주 계급 혹은 귀족 계급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당대에 태동하던 산업 자본주의 체제와 더불어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를 자신의 능력을 통해 삶을 쟁취하는 근대적 시민 개념으로 전환하는 데 생물학적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삶의 세계를 생존을 위한 경쟁의 장으로 해석하였다. 말하자면, 작금의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사회는 생물의 세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투사가 작동한 결과라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경쟁 시스템은 승자를 가려내는 공정한 시스템이 아니라 패자를 공정성의 이름으로 솎아내는 시스템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육은 한 사람의 인성을 발달시키고 사회적 관계를 훈련해서 성숙한 현대 시민을 길러내는 장이 아니라, 학력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패자를 솎아내고 밀어내는 시스템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다. 오늘의 정치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은 대의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지만, 이 정치 시스템 속에서 ‘대의’ 혹은 국민의 뜻은 전혀 반영되지 않으며, 오히려 국민의 이름으로 온갖 이권과 인간관계와 집단 이기주의가 실현되는 대중주의 시스템으로 변질하고 있다. 우리는 안다, 우리 시대 어느 분야에서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형제와 자매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최선을 다해 경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높은 자리로 승진하기 위해 경쟁하지만, 결국 사오십 대가 되어 기업을 운영하는 소수 운영진에 들어가지 못하면 명퇴가 자발적 선택권으로 주어진다. 결국 모두가 패자가 되는 시스템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나 실패는 할 수 있지만, 한 번의 실패는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차별로 이어진다. 그래서 더욱 죽을힘을 다해 노력을 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미끄러지는 일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세뇌받은 사회 구조 속에서는 언제나 ‘승자의 태도로 살아가라’는 압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여전히 우리 심리 깊숙이 뿌리박은 ‘가부장적 마음가짐’ 속에서 생물학적 남성들은 언제나 리더 혹은 보스가 되어야 한다고, 즉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을 촉구받는다. 그래서 자신은 남자고, 대인이고, 마음 넓은 승자인데, 현실은 경쟁에서 미끄러진 낙오자이고, 명퇴 위협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며, 골목길에서 수많은 치킨집과 분식집과 피자집과 경쟁하며 생존을 연명하는 자영업자일 따름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누군가의 말을 마음 깊이 믿으며, 성실하게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취업하려 하면서, 언젠가는 이 시대의 주역이 될 거라 믿고 있지만, 현실은 학자금 대출금을 갚기 위해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며 학업에서 뒤처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상 세계로 탈주를 시도한다. 적어도 게임 세계 속에서 자신은 세계와 우주를 구하는 영웅이지만,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면 실직의 위협이, 생존의 위협이, 편의점 알바라는 현실이 기다린다. 그래서 그들의 진정한 마음의 고향은 가상 세계다. 가상 세계에서 잠시 먹을 것을 찾아 혹은 게임을 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현실로 외출한다. 그들은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다.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포스트 휴먼 자본주의 속 현실에서는 이미 ‘무능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사람들은 망상을 창조한다. 이 모든 시대의 난국은 ‘저들’ 때문이라고. 각자가 가리키는 ‘저들,’ 즉 이 시대를 망친 저들은 각각 다양하지만, 그 ‘저들’이 망상적으로 가상의 상상력을 통해 창출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좌파 빨갱이, 수구 꼴통, 페미니스트, LGBTQ, 미친 사람, 강남 좌파, 토착 왜구 등.
무능할 수밖에 없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삶의 현실에서 자신의 실패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지만, 섣불리 아무에게나 토해낼 수는 없다. 그래서 그 ‘저들’은 만들어져야만 한다. 이 불안정한 시대를 그나마 유지하려면 말이다. 그렇게 정치적 마니교는 시대의 주류 신앙이 되어, 개인의 종교 유무와 상관없이, 정치적 성향의 좌우에 상관없이, 모두의 사고방식을 기초하는 논리가 되어 버린다. 무능의 시대, 자신의 무능함을 받아들이고 수긍할 수 없는 세대는 그 무기력을 분노의 감정으로 치환하여 쏟아낼 대상들을 망상으로 만들어낸다.
박일준 Ph.D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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