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정치적 책임 (1)
By Eun-Jae Lee
“기독교는 인권과 정의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경쟁자들과 협력하는 가운데 해결책을 내놓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주변으로 떠밀린 세력은 여성들, 아동들, 농업, 그리고 기억에서 사라진 갈등들을 비롯해서 셀 수 없이 많다. 물질 만능과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빈곤층이 이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믿음, 소망, 사랑’은 더는 황금률 같은 미덕의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호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또한 기독교의 실존은 현대 사회에서 불가피한 저항 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비기독교적인 세계 구조에서 기독교는 때론 동맹과 협력을 통해, 때론 저항과 항의를 통해 카오스(Chaos)의 시대를 카이로스(Kairos)로 전환하려는 희망을 드러내야만 한다.”
들어가는 글
기독교 신앙과 정치의 관계 혹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묻는 일은 매우 고전적인 질문인 동시에 상투적인 관행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교회 혹은 신앙과 정치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 둘의 관계가 현재라는 시점에서 받아들일 만하거나 의미심장한 것인지를 묻고, 이로써 정치에서 기독교적인 책임 혹은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율법의 크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답변해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절대 간과하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도행전의 공동체 이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철저히 한 식구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사도행전 2:44~46). 그런 점에서 남아있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정치적인 지형을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만의, 그리스도인다운 입장이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역사적인 전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체계를 도입하였고, 자신의 후계자들이 점차 강화해 나가도록 했다. 지금까지 그가 시도했던 체계의 본질적인 내용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에서 필요한 수정을 가하는 방식으로(mutatis mutandis) 유지되고 있다. 아래의 특징들은 이 체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들이다.
신앙의 순수함과 이에 대립하는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 종교적 신념과 이에 맞서는 사회적인 책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1. 국가는 교회를 초감각적이고 영적인 안정 요소로 보증한다. 이를 통해 국가는 영적인 방향을 정립하고 안정을 추구한다. 무엇보다 국가는 스스로 신에 의해 질서가 잡힌 상태라고 규정하고, 따라서 황제는 전능자 그리스도(Christus Pantokrator)의 대리자인 동시에 신적인 자기 의무의 대상이라고 간주했다.
2. 교회는 이런 체계로부터 적지 않은 명성과 안정을 획득하였다. 교회의 존재는 점차 확실해졌고, 사회적으로 커다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자신의 과제를 이행하는데 수월했다. 교회는 자신의 활동을 확장하는 가운데 교리와 윤리의 차원을 전체 사회에 각인시켰다. 교회는 사회의 교사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방대한 저작인 “신국”(De civitate Dei)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그 역할을 논리정연하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때 교회는 자신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성을 무릅써야만 했다. 교회가 자신의 선교와 교리를 관철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를 놓고 언제나 비평적으로 성찰하였던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자신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하려는 기회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살아남았다.
3. 물론 모든 교회가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은둔 수사들이 광야로 들어갔고, 공동체들이 수도원을 통해 반-사회 체제를 구축하였다. 순수함을 회복하려는 그룹들이 항상 존재하였으며, 지배적인 제국 교회라는 권력 집단에 도전하고 결별을 고했다. 그들의 선택은 사회에 대한 포괄적인 영향력의 포기였다.
그런 점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체계에 대해 교회가 언제나 그리고 동일하게 규정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시대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새롭게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옛 시대의 체계와는 상이하게 변화된 오늘의 상황에서 신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인 발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다루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확실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통해 설정되었던 두 가지 선택은 교회가 장단점을 갖게 한다는 사실이다. 즉 신앙의 순수함과 이에 대립하는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 종교적 신념과 이에 맞서는 사회적인 책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교회는 이런 상태에서 자신을 지키기도 했고, 배신하기도 했다. 이는 역사적인 진리가 복합적인 것이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기독교 역사는 그 자체가 성인들의 연대기도 아니며, 스캔들의 연대기도 아니다.
세속화 과정
만일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심판대에 오른다면, 먼저 그 관계를 물어야 하지, 공범자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관계 그 자체를 묻거나 부분적으로 개별적이거나 구체적인 난제 상황을 문제 삼아야 한다. 콘스탄티누스의 체계는 교회와 국가 문제가 분리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에 굳이 논쟁이 필요하다면 우선 허용된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허용되지 않은 것인지를 다루어야 하며, 다음으로 그것이 원칙적인 관점에서 수행된 것인지 혹은 구체적인 정황에서 수행된 것인지, 그래서 일반적으로 다룰만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기독교화된 로마 제국은 그 발전 과정에서 교회와 국가, 교황과 황제의 동맹 관계에 의한 지배력을 지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를 거치면서 동맹 관계는 종국을 고하게 되었다. 더는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보다 많은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고, 30년 전쟁(1618~1648)과 프랑스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사건으로서 하나의 지배적인 교회란 불가능해졌다. 이제 교회는 사회 안에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해야만 했다. 본질적으로 다원적인 정당 국가라는 조건 아래에서 교회는 단지 부분적인 정치적 힘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기에 교회는 근본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1. 거절과 거부 – 정치적인 체계로부터 완전한 퇴거: 이런 선택은 단지 처음이나 과도기 국면에서 혹은 부분적으로만 효과적이다.
2. 계속해서 전제정치를 위해 투쟁하려는 시도: 이는 복고적인 경향과 파시즘 세력의 도움으로 몇몇 국가들에서 가톨릭교회가 시도했던 방식이다.
3. 새로운 상황의 수용: 교회가 새로운 정치체제의 부분 세력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다시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1) 기독교 정당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정치의 형태를 가지고 정치적인 사건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다른 모든 정당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경우다.
2) 교리와 교회의 정신을 양심적으로 감당하려는 기독교 정치인들을 통해서 정치영역에서 자신의 입장과 위치를 점유하려는 경우다.
3) 교회가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 비평적인 중재를 수행하는 가운데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때 교회는 일상적인 정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거나 목적 지향적인 제시를 한다.
이런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방식들은 너무 많아서 다 거론할 수 없다. 그러나 몇 가지를 언급하자면, 정치적인 설교와 중보기도, 목회 서신, 실질적인 참여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다원주의적이고 세속화된 사회에서 교회의 이런 방식은 상대적인 효과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은재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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