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꿈을 빚는 일은 중단될 수 없다
By Kisuk Kim
“기후 붕괴 시대, 인간세라는 용어가 통용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구원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아니, 하나님은 이런 위기의 시대에 우리와 더불어 어떤 이야기를 쓰시려는 것일까?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망가진 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이 가능할까? 지금 우리 상황은 마치 거센 물결에 떠밀리며 큰 폭포를 향해 가고 있는 작은 배에 탄 형국이다. 때로는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만 할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도 있다.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파멸을 맞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위기의 시대
“우주 공간에서 우리의 별 지구는 다른 별 하나를 만난다. 그 별이 지구에게 묻는다. ‘너 잘 지내니?’ 우리의 별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가 못해.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태우고 다니거든.’ 그러자 그 낯선 별이 지구를 이렇게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까짓것, 신경 쓰지 마. 금방 사라질 거야.”[1]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웃을 여유가 없다.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 시대에는 예언이 작가들의 언어를 통해 주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보았던 카툰 하나가 기억난다. 일단의 사람들이 나뭇가지 위에 선 채 톱질을 하고 있다. 자기가 서 있는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한 사람이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톱질하던 이들은 잠시 어리둥절해졌지만, 잠시 후 ‘별 어리석은 놈을 다 보았네’라는 표정을 지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운명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번지고 있을 때,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그 사태를 바라보았다. 야생 동물을 마구 먹어 치우는 중국인들의 식습관을 비웃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시아인들이 병을 전염시키는 매개체처럼 여겨져 수모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코로나는 쓰나미가 되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제4차 산업 혁명도 AI도 이 문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마치 죽음의 독이 사람들 사이에 스멀스멀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음모론을 들먹이는 이들도 있지만, 이 사태는 정확하게 자연의 역습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재미 저널리스트인 안희경과의 대화를 통해 코로나19가 기후 변화의 결과라면서 매우 중대한 통계 수치를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이 지구에 남은 마지막 야생의 터를 침범하고 있다”면서, “1900년만 해도 인간이 사는 땅은 14% 정도”였지만 “지금은 거의 77%”에 달한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 서식지를 잃어버린 동물들이 인간들 곁으로 왔고, 그 동물들의 몸을 타고 바이러스가 인간 세계로 넘어왔다는 것이다.[2] 이런 상황을 예측한 사람이 있었나? 간헐적으로 위험을 경고한 이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상황이 심각해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삶은 계속될 거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의지했을 뿐이다.
욕망의 터전 위에 세운 집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세찬 바람이 불고, 거친 물살이 밀려들고 있다. 삶이 위태롭다. 기후 위기의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후 위기를 넘어 기후 붕괴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재난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취약한 이들부터 괴롭힌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조어를 통해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이후의 세계를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이 용어는 불안정하다는 뜻의 ‘precarious’와 무산 계급을 말하는 ‘proletariat’를 결합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에 위협을 느끼고, 일자리·소득·재산 등을 잃거나 좌천·배제·거부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3]이다. 2020년의 프레카리아트는 팬데믹 상황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 사회·경제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이다.
절망을 넘어
코로나19는 먼 우주를 탐사하고 극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인간이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세계를 멈춰 세웠다. 얼마 후 백신과 치료제가 나온다 해도 또 다른 감염병이 찾아올 거라는 불길한 징조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삶의 토대가 흔들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모두가 다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이후 시대를 가늠하기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은 없다.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처럼 우리는 과거의 잔해를 바라보며 미래로 떠밀려 가고 있다. 이 물결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교회가 누렸던 과거의 영화로움은 이제 지나갔다. 시민 사회의 영역에서 교회는 퇴행적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형편이다. 번영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큰 매력으로 느껴지지 않는 시대가 열렸다.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줌으로 자기 확장을 도모하던 교회의 기획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다른 곳은 모르겠으되 한국 교회는 이제 확고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하여 침몰하는 교회의 잔해 위에 서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이나 부르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가 진정 부활을 믿는다면 패배가 자명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한다. 만가나 읊조리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재확인하는 일이고, 재앙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고,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이다.
바벨론 포로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암흑기임이 분명하다.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졌고, 성전 또한 파괴되었다. 무너진 것은 가시적인 건물만이 아니었다.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속절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포로로 잡혀간 이들의 삶은 참담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범람하는 지역에 정착하여 살던 그들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재해 앞에서 무기력했다.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공허,’ ‘혼돈,’ ‘흑암,’ ‘깊음’은 포로들이 직면한 현실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큰 손이 자기들을 품고 있음을 느꼈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 그것은 현실이 무너뜨릴 수 없는 근원적 희망이었다. 그들은 절대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고, 버림받은 존재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 사실을 붙드는 순간, 중력처럼 그들을 잡아당기던 절망은 약화할 수밖에 없었다.
성전 중심의 예배가 무너지는 순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셨다. 성전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이었다. 물론 그런 경험의 뿌리는 성전 예배의 기억이었다. “기억은 과거의 모습을 한 채,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살고 있는 미래다.”[4] 기억 속에 미래가 있다. 다니엘은 왕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다락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 앞에 엎드려 하루 세 번씩 기도를 올렸다.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처럼, 경외심을 품고 엎드린 자리가 곧 성전이 아니던가.
아픔을 자기에게로 끌어오다
가장 참담한 시기에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불렀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그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벼락처럼 닥쳐온 불행을 뜻있는 불행으로 만들 용기를 냈다. 돌이켜 생각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접속되었다. 연약한 자들이 세상을 정화한다는 신비와 역설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이사야 53:4~5).
눈이 열리자 그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 현실 너머에서 비쳐오는 밝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순과 상처, 아픔을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척박한 역사의 언덕을 넘는 사람들,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메시아는 이 땅에 도래하신다.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이 시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탔던 배가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 떠밀리던 때가 떠오른다.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조차 살아날 희망이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하던 때 바울은 선원들과 동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바울은 배는 잃게 되겠지만,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생명을 살리고 북돋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이들이 감당해야 할 소명이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훨씬 이전에 로마 제국은 두 차례나 큰 위기를 맞았다. 큰 역병이 찾아와 제국을 뒤흔들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통적인 종교는 그 재해 앞에서 무기력했다. 두 번째 역병의 절정기인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는 교인들에게 보낸 부활절 서신을 통해 “다른 이를 돌보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한 지역 기독교인의 영웅적인 간호 노력”을 치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옮자 그 아픔을 자신에게로 끌어와 기꺼이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를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5]
소비자 종교를 넘어
코로나19 이후 시대에 교회의 생존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우려에 깊이 공감하지만,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부조리를 기꺼이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위기에 처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 정신이 아니던가?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예로 들면서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고 말한다(히브리서 13:12~13). 교회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산 교회와 죽은 교회로 구분될 뿐이다. 산 교회는 예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다. 코로나19는 자기 확장을 꾀하느라 잊고 있던 우리의 근본을 돌아보라는 경고의 나팔소리다.
앞에서 소개한 네이선 D. 미첼은 오늘의 교회가 복음을 상품으로 만들어 매력적인 포장지에 싸서 판매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면서 그것을 일러 ‘소비자 종교’라 했다. 복음이 상품이 될 때 생기는 일은 어떤 것일까?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하면서 체득한 습관, 관습 그리고 태도들이 모든 사람, 모든 장소 그리고 모든 사물과 맺는 우리의 관계에까지 파고들어 오는 것을 의미한다.”[6]
물론 교회는 아픔을 겪고 있는 교인들 곁으로 가야 한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던 예수님처럼 그들이 겪는 현실의 곤고함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동시에 자기 삶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욕구를 내려놓도록 도와야 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 5절에서 “너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도 반신반의하는 아브라함을 장막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믿음이란 더 큰 세계와의 접속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두운 신비 앞에 설 때,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은, 잠긴 문 안에서 눈물로 자신과 세상의 의심에 맞서 하나님 나라 표적을 드러내는 자가 되라는 부르심”[7]이라고 말한다.
유배의 시간을 창조적인 시간으로
지금 우리는 유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배의 시간은 재정비의 시간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잎을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고 하늘을 훨훨 나는 나비처럼 우화등선의 꿈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부득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한계 상황을 통해 실존의 도약을 감행하는 데 있다. 인간의 숭고함은 자기를 넘어서는 데서 발현한다. 십자가 아래 서 있던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고백했다. 정체성에 대한 자기 진술이 아니라 선택하고 지향하는 삶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유배의 시간은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고향이 되어 주어야 할 시간이다. 고향이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해도 괜찮은 곳, 사회가 우리에게 씌워준 페르소나(persona)를 연기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다. 관용과 용납의 공간이다. 받아들여짐을 체험할 때 사람들의 상한 마음이 치유된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람들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때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한다. 코로나19는 그간 우리들이 맺고 있었던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 연결점이 사라질 때 삶은 적막강산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면서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에베소서 4:16a)라고 말한다. 돈이 주인 노릇을 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립시키려 한다. 불안을 증폭시키고, 불안의 대용물에 집착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나 믿음은 고립을 넘어서 연대하려는 용기다. 내 삶의 이야기에 다른 이들을 동참시키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 말이다. 내 생명이 다른 이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새로운 차원의 삶이 개시된다.
기후 붕괴 시대, 인간세(Anthropocene)라는 용어가 통용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구원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아니, 하나님은 이런 위기의 시대에 우리와 더불어 어떤 이야기를 쓰시려는 것일까?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망가진 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이 가능할까? 지금 우리 상황은 마치 거센 물결에 떠밀리며 큰 폭포를 향해 가고 있는 작은 배에 탄 형국이다. 때로는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만 할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도 있다.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파멸을 맞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두려운 질문 앞에서 바장일 때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큰 힘이 된다.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인간은 무언가 밝은 빛을 기대할 권리가 있는데, 그러한 밝은 빛은 이론이나 개념에서보다는 오히려 불확실하면서도 깜박이는 약한 불빛에서 나올 수 있다.”[8] 갈 길이 환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해 할 것 없다. 지금 여기서 비록 희미할망정 작은 불 하나를 밝히면 된다. 그 불빛들이 모일 때 역사의 꿈이 시작된다. 교회는 그 불빛들을 모아 역사의 꿈을 빚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창조의 새벽에 주님이 창조하신 그 빛은 스러질 수 없다.
SOURCES
[1] 프란츠 알트, 생태주의자 예수, 손성현 옮김 (나무심는사람, 2004), 44.
[2] 제러미 리프킨, “코로나는 기후 변화가 낳은 판데믹…함께 해결 안 하면 같이 무너져,” 경향신문, 2020년 5월 14일.
[3] 지그문트 바우만, 스타니스와프 오비레크, 인간의 조건, 안규남 옮김 (동녘, 2016), 73.
[4] 네이선 D. 미첼, 예배, 신비를 만나다, 안선희 옮김 (바이북스, 2014), 160.
[5]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 (좋은씨앗, 2016), 129.
[6] 네이선 D. 미첼, 예배, 신비를 만나다, 65.
[7] 톰 라이트, 하나님과 팬데믹, 이지혜 옮김 (비아토르, 2020), 116.
[8]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홍원표 옮김 (인간사랑, 2010), 11.
김기석 목사
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LID Leadership Journal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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