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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위한 공동체 사역: 기독교 변증 (1)

By Eun-J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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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학자는 깊은 탄식으로 작금의 한국 교회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세속주의, 기복주의, 물질주의, 배금주의, 성장주의, 대형주의, 경쟁주의, 집단주의, 배타주의, 적대주의, 세습주의 등 ‘적폐’의 온상이 된 지 이미 오래다. (중략) 어쩌면 다음과 같은 성서 구절은 한국 개신교의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부패와 타락을 이미 오래전부터 예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i]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변증”이란 개념은 그리스어 동사 “ἀπολογέομαι”(apologeomai, 변호/변론하다)와 명사 “ἀπολογία”(apologia, 변호, 해명, 정당화)에서 유래한다. 여기에서 두 개념이 활용되었는데, “Apologie”는 문서나 구두로 하는 변호 자체를 나타내기에 변론 진술 혹은 해명서를 뜻하지만, “Apologetik”은 변호의 가능성에 관한 학문적인 숙고를 의미한다. 즉 “Apologie”가 실제적인 실행이라면, “Apologetik”은 변호의 토대와 수행에 관한 성찰이므로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변증이란 기독교 신앙이나 가르침, 기독교 진리를 비기독교 세계에 변호하는 것이다. 변증의 내용이 복음과 진리라면,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는 복음의 선포를 각 세대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프랜시스 쉐퍼(F. Schaeffer, 1912~1984)를 언급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기독교 변증은 가르침과 선교라는 두 차원을 갖는데, 둘 다 신앙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모든 도전과 공격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즉 기독교 변증이 필요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여러 측면에서 위협당하고 이에 따라 변호가 필요하기 때문이지만, 단순히 지적인 논의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라는 인식이 더욱 필요하다. 누군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을 도울 수 있고,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존재와 비존재, 구원과 정죄, 삶과 죽음의 문제에 연결된다는 말이다.

기독교 변증이 필요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여러 측면에서 위협당하고 이에 따라 변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변증에 관한 성서의 대표적인 구절은 베드로전서 3장 15~16절이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경에는 많은 변증 사례가 등장하는데,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그 권한을 물었던 제사장과 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이 대표적이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태복음 22:46).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진리의 증인이요, 신적인 말씀과 구원의 복음이 지닌 진리의 중재자였다.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 기독교는 마술(사도행전 8:4~25), 우상숭배와 다신교(로마서 1:22 이하; 고린도전서 8:4 이하, 10:14 이하), 영지주의(디모데전서 6:20 이하), 자유 방임주의(마태복음 7:15, 19; 갈라디아서 1:6~9; 요한계시록 2:14~16)에 맞서 싸웠고, 거짓과 미혹을 통해 공동체를 그릇된 삶으로 이끌 때는 돌이키게 하거나 심지어는 공동체로부터 잘라내었는데, 이것이 적용된 대표적인 구절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이다. 우리는 언제나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전서 3:11).

많은 이들은 한국 교회가 개신교의 정신 혹은 복음적인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화된 세계로부터 도피한 채 시대착오적인 기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고발한다. 도대체 근대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은 근대의 상징으로 계몽주의를 떠올린다. 오늘의 현실 역시 종교적인 계몽주의를 그 바탕에 두고 있다. 그런데 계몽주의란 역사적 산물이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계몽주의 그 자체라기보다는 계몽주의가 지닌 시사성(時事性)을 언급하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재의 종교적인 삶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사건이나 관계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계몽주의 이후 그 역사적인 과정을 추적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계몽주의 이후를 살아가는 종교란, 우리가 이미 실행되고 성취된 계몽주의의 전제들 아래에서 종교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현대 문명은 지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문화의 종합이며, 종교 역시 이런 맥락에서 분리될 수도,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현대는 계몽주의가 끌어낸 과정 그 이후의 잔여(殘餘)라는 성격을 갖고 있어서, 분석하고 규명하고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해할만한 것 혹은 타당성을 생산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서구에서 계몽주의는 이런 활동을 통해 첫째, 제도적인 관습이나 통용되던 관례의 비호(庇護)를 청산했다. 즉 종교에 대한 정치적인 결속력을 파기시킴으로써 당연시했던 교리나 가르침을 그 공적인 승인 과정에서 무력하게 만들었다. 둘째, 종교적인 신앙고백과 시민권의 연결 고리를 최종적으로 벗겨냈다. 신앙고백에서 진리와 오류라는 차이가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탈(脫)정치화됨으로써 관용의 투쟁과 승인을 거쳐 종교의 자유를 획득했다. 셋째, 종교적인 방향과 이성의 요구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극단화했다. 즉 종교를 논리의 일관성, 진리와 행복의 인지라는 조정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면제시킴으로써 단지 신념이나 개인적인 성향으로 간주해버렸다.

계몽주의가 종교를 해방한 것인지 아니면 종교로부터 우리를 해방한 것인지는 양립 가능한 관점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종교를 해방하여야만 지속해서 종교 생활을 하게 된다는 기정사실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ii] 계몽주의가 종교를 해방했다는 말은 종교적인 진리를 위한 제도적인 세력의 보호를 해체했다는 것이며, 시민권을 이 진리의 신앙고백으로부터 연결 고리를 벗겼다는 것이며, 학문적으로 조정이나 감시할 수 있는 전제에 대해 종교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공평)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종교는 검열심급(檢閱審級)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불경한 책 제목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주장에 대해서조차 모독 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 신앙고백 없이는 네덜란드의 여왕이 될 수 없다거나,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종교부 장관은 임용할 수 없다는 인식이 도전받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은 철저히 사적인 문제로 간주하며,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은 더는 맹세나 서약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더구나 신학의 범위 바깥에 있는 다양한 학문의 전공자들은 성서의 세계에 대해서 신앙적인 차원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계몽된 세계의 종교는 역사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그 문화적인 크기와 힘을 돌이킬 수도 없으며,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계몽주의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관철해 달라는 요구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문화적인 존재로서의 종교가 지닌 틀을 변형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역사적이고 기능적인 차원은 서로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는 없다. 이를 위해서 첫째, 신학적으로 훈련되고 전승된 종교적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진보적이며 발전적인 인식의 추세에 걸맞게 보조를 맞춤으로써 현대라는 체계와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종교의 기능화된 성격에 따르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가르침이 정말로 믿고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를 판단하기보다는 그것이 현대인의 삶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종교적인 가르침과 제도의 역사화는 종교의 필수적인 기능과 인접해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해석과 번역의 과정을 통해 전승된 가르침의 역사화는 종교의 존재를 생활에 필요한 그 어떤 것으로 분담해 왔다는 말이다.

따라서 계몽된 세계에서는 종교를 철저히 기능적으로 정의하려는 성향이 뚜렷한데, 이는 옛 가르침이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도록 하려면 해석학적인 과제를 통해서 끊임없이 현재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단순히 ‘참이냐 거짓이냐’를 놓고 진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혹은 ‘실용적(합목적적)인지 아니면 무용지물인지’를 먼저 묻게 된다. 그래서 칸트는 “종교란 우리의 모든 의무를 신적인 계명으로 인식하는 것”[iii]이라고 보았다. 이제 종교는 도덕과 윤리의 차원에서 그 실천성을 따지게 된 동시에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한 인식론적인 요구는 하찮은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영혼의 불멸, 하나님의 존재, 최후의 심판에 관한 신앙고백과 같은 주제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최소화되고 말았다.

이 시대를 위한 공동체 사역: 기독교 변증 (2)

이은재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19


[i] 김덕영, 루터와 종교개혁 (도서출판 길, 2017), 341.

[ii] K. Marx, Zur Judenfrage in Werke Bd. 1 (Berlin, 1970), 369. “인간은 종교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유지한다.”

[iii] I. Kant,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in Werke, Bd. VI,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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