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위한 공동체 사역: 기독교 변증 (2)
By Eun-Jae Lee
기독교 변증은 다시 기독교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을까? 기독교 변증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시는”(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세상의 창조자요 구세주이시며 구속의 완성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실용주의나 억지로 틀에 맞추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성서와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단지 전문가이기에 변증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감당하는 몫이어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자 하는 제자도는 부르심에 합당한 사랑받는 그리스도인과 같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다고 선언했으며(고린도전서 12:4 이하), 주님이 세워주신 다양한 직임을(에베소서 4:11~13) 신자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기에 기독교 변증이라는 과제는 결코 신자들 모두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쉐퍼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기독교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으며, 실제적이다. 기독교가 실제적이라 함은 진리 없이는 희망이 없고, 충분한 토대 없이는 진리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세계와 인간의 상실로 말미암은 병적인 상태에 대해서와 동시에 그에 대한 치료법까지 알고 있다. 기독교와 세계라는 대조적인 생각을 포기하는 순간 더는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대조적인 명제와 더불어 비로소 기독교는 추상적인 진리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의와 진리를 선사하시는 하나님께 기초를 두게 된다.”[i] 진리와 거짓, 구원과 정죄 사이의 대조는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동료 인간들과의 삶에서 구원의 복음을 위한 접촉점이 된다. 기독교 변증은 영적인 세력과의 다툼이라는 사실(에베소서 6:12)은 접촉점이 갖는 의미를 온전히 드러낸다.
오늘날 세속화된 인간은 ‘나는 믿을 수 없다’(지식의 차원에서)라거나 ‘나는 믿기를 원치 않아’(도덕과 윤리라는 차원에서)라며 자주 보호막을 친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보호막이 때론 다수의 원리라는 민주주의 절차에 의존함으로써 은폐(隱蔽) 내지는 차폐(遮蔽)를 하는 때도 있다. 그것이 어떠한 경우이든, 기독교 변증은 지혜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만 보호막을 깨뜨릴 수 있다. 물론 변증적인 대화와 논의가 항상 필요하지만 말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회고해 보면, 그동안 교회는 변증적인 입장을 놓고 성서의 증언과 신앙고백 문서 그리고 선교적인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확고했다.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 변증적인 태도가 두드러진다.
교회는 변증적인 입장을 놓고 성서의 증언과 신앙고백 문서와 선교적인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확고했다.
첫째, 대화의 변증 혹은 대결의 변증 – 변증은 다른 진리의 요청에 대해 얼마나 관용적인가를 놓고 보여준 방식이다. 평화로운 토론, 존경과 인내를 담아 타자를 경청하고 배우는 방식의 대화는 기독교의 미덕이다.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과 다른 종교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다른 이들과 평화스럽게 대화할 때야 가능하다(베드로전서 3:16; 야고보서 1:19). 반면에 기독교의 진리를 요구하거나 개종이라는 차원의 세계 선교라는 과제를 놓고 보면, 대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적인 진리를 대화로 이해하는 한, 어떠한 형태이든지 논의는 일시적일 뿐 원칙적으로는 무효화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 혹은 연계된 변증 - 칼 바르트(Karl Barth)는 모든 자연적인 신학을 날카롭게 거부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이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외부에서 하나님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에게 하나님에 관한 진술은 인간의 종교적인 요청에 대해 변증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 반면에 에밀 브루너(Emil Brunner)와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는 성서에 호소하면서 말씀 계시 외에 원-계시 혹은 창조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였다(로마서 1:18~20, 2:14 이하; 사도행전 14:15~17, 17:23).
셋째, 위로부터의 변증 혹은 아래로부터의 변증 - 영어권에서 “추정론”으로 알려진 변증적 방법론은 “전제를 인식한 변증”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이 타자의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비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의미를 두고 토론할 때 중립적인 지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에 내재적인 변증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고, 이를 “증거론”이라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필자는 기독교 변증이 공동체를 위한 도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하나의 교회가 존재하지도 않으며 이에 따라 교리가 부단히 격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 간에 협력 대신 갈등과 분열이 조성되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비록 기독교 변증이 일차적으로는 사유(思惟) 행위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양식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신념과 확신에 걸맞게 살아가는 이들이며, 설령 이로 인해 고난이라는 대가를 지급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베드로전서 3:17). 변증이란 항상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유하고 겸손하게(베드로전서 3:16) 대답하는 것이기에 “사랑의 섬김”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타인과 다른 생각에 대해 진지한 관심과 인내를 갖고 경청함으로써 올바른 이해에 이르도록 힘써야만 한다. 기독교 신앙은 신학 논문이나 대학에서 행하는 논쟁의 형식을 통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와 개혁을 통해 발생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문제에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 가운데 보여주신 소식을 삶의 자리에서 대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점에서 진리를 알고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라, 잘못하거나 실수하기 쉬운 연약한 인간으로서 삶이라는 영역에서 수많은 대화 상대자들로부터 배우고 깨닫는 과정 가운데 끊임없이 하나님 앞으로 되돌아가는 훈련을 통해 거듭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기독교 변증은 전문가를 위한 규율이라거나 특정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 변증이 타인의 오류나 약점을 끄집어낸다거나 기독교 신앙을 위한 방어막을 친다고 해서 신앙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변증적인 수고는 이에 대한 기쁨과 자유의 응답인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 4:15).
이은재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i] Francis Schaeffer, Gott ist keine Illusion (Wuppertal: Brockhaus, 1974), 4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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