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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교회의 역할: ‘인간다움’만이 ‘기계다움’을 이끈다

By Kyoung-Dong Yoo

Stock hymnal and bible on back of pew

교회에서 안내하는 로봇을 볼 날이 머지않다. 교우들의 얼굴 인식 및 의료 생체 데이터, 그리고 지난 수년간의 교회 활동 자료까지 입력한 초지능 로봇은 교회에 오는 교우들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환영하고, 맞춤형 교회 봉사를 소개하고, 심지어 교우들의 건강 상태까지 염려하여 줄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는 성경 본문과 주제어를 입력만 하면, 컴퓨터는 전 세계의 설교와 주석을 검색하여 ‘창의적’(?)인 설교를 만들어 내고, 감동적인 기도문을 작성하고, 새로운 찬송가를 만들어 내어 사역자를 도와줄 것이며, 목회자가 마음만 먹으면 교우들의 심장 박동수를 점검하여 설교에 대한 반응도 데이터로 정리하여 둘 것이다. 그리고 교회 주방에는 로봇 요리사가 등장하여 조리하여야 할 음식만 주문하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척척 준비하여 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줄 위와 같은 교회 일상은 언뜻 과학 문명을 통하여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못한 낯선 모습들도 나타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미래의 길’(Way of the Future)이라는 교회가 생겼는데, 인공지능을 신격화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신으로 섬기니, 성경과 교리, 그리고 교회 생활을 매뉴얼로 입력한 로봇이 주일 예배에 참여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초지능을 신격화하다 보니, 인간의 희로애락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소위 ‘알고리즘’(algorithm)적 사고가 신앙의 영역까지 파고들어서 감정이 없는 비인간화를 촉진하게 될 우려도 있다. 심지어 인간의 뇌를 스캔하여 저장하고, 그 입력값을 홀로그램(hologram)으로 만들어 영화에서나 봄 직한 ‘인간의 불사’(不死)까지 주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부활론은 정면으로 도전받게 될 것이다.

위와 같은 교회의 일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작금의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는 이전 세 차례에 걸쳐서 사회 경제 체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차 산업혁명은 18세기 증기 기관의 발명을 통하여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기계화의 길을 열어 놓았다. 2차 산업혁명은 20세기 초 전기의 발명을 통하여 컨베이어(Conveyor)와 같은 시스템에 전기가 공급되어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3차 산업혁명은 불과 60여 년 전인 1960년대부터 시작된 컴퓨터 혁명으로 자동화로 치닫게 되었는데, 각종 전문 분야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4차 혁명은 물리적 공간과 사이버 공간을 연결하여 인간 지능을 압도하는 초지능 로봇이 등장하여 모든 분야에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지금 진행형이기 때문에 아직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교회 공동체는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여야 할 지혜가 다음과 같이 필요하다.

첫째, 교회 공동체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하여 제기되는 ‘인간성의 위기’에 주목하여야 한다.

전통적으로 인간 주도형의 세계관은 ‘인간과 비인간’과 같이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인간의 경우, 자율성과 창의성을 그 특징으로 삼았다. 인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형 기계들은 아직 반(半)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로봇 인형과의 결혼이나 로봇 반려견의 장례까지 치러주는 추세를 보면, 앞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로봇과의 상호 교류가 촉진될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자연히 인간과 인간이 구축한 기계적인 가상 세계에서 상호 공유된 세계관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초지능과 같은 무제한적인 정보와 광(光)속도에 근거한 기계와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과연 인간이 기계를 따라갈 수 있는 생물학적인 능력이 있으며 또는 기계를 통제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정신적 능력을 고려하지 못하고 기계와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도모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사이의 공감과 배려, 그리고 친밀감이 줄어들고 기계처럼 소진되는 인간성 소비의 현상을 심화시킬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가상 공간에서 떠도는 인간의 존재와 물리적 실체 사이에 발생하는 ‘존재의 이중성’과 같은 문제는 인간이 현실감이 없는 ‘아바타’(avatar)와 같이 되어서 형식적으로는 디지털(digital) 세계를 떠도는 ‘디지털 유목민’이 되지만, 생물학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본유의 특수성과 차별성을 상실하게 되어 어떤 존재가 실체인지에 대한 혼란이 증폭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영역 모호성의 문제에 대하여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학적 세계에 대한 가치와 인간 존엄성을 더욱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인간이 조립한 기계 사이의 가치관 충돌을 막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며 기계는 기계다워야 한다”라고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죽게 되었지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으며, 이제는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천국을 준비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이자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기계는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이 입력한 정보에 따라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계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초지능은 이제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간을 대신하여 행위의 주체자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초지능은 전통적인 인간 주도형 서비스를 기계형으로 대체하여 작게는 자율주행차량으로부터 의료와 법률 영역까지 나아가 인간을 대신하여 의사 결정에 주체적인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인간이 주입한 명령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의 책임이 인간의 그것과 혼재되어 가는 미래 사회에서 교회 공동체는 기계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다움’의 방식에 대하여 그 소명을 더욱더 다하여야 할 것이며, 이는 자연히 다음의 ‘인간다움’의 방식에 대하여 주목하게 된다.

둘째, 교회 공동체가 인간성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써 주목하여야 할 ‘인간다움’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인간이 중시하여 온 도덕성과 윤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게 하며, 기독교 공동체도 영성을 통한 성화(聖化)를 강조하여야 한다.

‘기계다움’은 ‘인간다움’이 전제된다. 초지능과 같은 컴퓨터의 개발은 인간이 하는 것이며, 기술의 사용 방법도 인간이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기술 사용의 규범 또한 인간이 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초지능의 사용에 대한 규범과 의무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계가 기계다우려면,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며,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인간의 규범과 도덕이 우선되어야 한다. 즉 인간성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기계 윤리’(machine ethics)를 설정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그 ‘혁명’에 어울리는 인간성의 신장은 과연 이루어졌는가? 온 지구가 무분별한 개발과 인간 위주의 과학 기술 때문에 야기된 온난화로 열병에 걸려있고, 상품의 세계화만 강조되는 시장에서 값싼 노동력이라도 찾아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이주 노동자들이 지구촌 구석구석을 방황하고 있다. 이념과 인종, 그리고 종교적 가치 체계의 충돌로 테러와 분쟁이 그치지 않으며, 안보의 명목으로 핵무기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구 곳곳이 넘쳐나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지구 궤도에는 우주 과학 기술의 명목으로 내버린 우주 쓰레기들이 유영하고 있다. 빈곤과 영양실조로 수많은 어린이가 매년 생명을 잃고 있으며, 빈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 구호에 걸맞은 인간성의 발전과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사회 공동체의 실현이 너무나 아늑하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감정일까?

교회 공동체는 영적 각성을 통하여 상실한 인간성의 회복에 진력하여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자연을 다스리고 보전할 의무를 졌으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 인간의 기술 능력에 의한 초지능이 인간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는 더욱더 성숙하여야 한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도덕적 능력의 신장뿐만 아니라 거룩하여지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기계 문명에 대한 ‘거룩성’의 강조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목적에 전념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거룩한 기계는 없으며, 거룩한 초지능도 가당치 않다. 거룩한 데이터도 존재하지 않으며, 거룩한 컴퓨터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룩함이란 기계적 연산과 데이터값을 뛰어넘는 정신적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희생하여 남의 생명을 살릴 때, 우리는 ‘고귀’나 ‘거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 그들의 상처를 씻어주고 아픔을 함께할 때,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거룩함’(聖, Holy)이란 단어를 우리가 함부로 쓸 수 없지만, 인간 영성에 대한 최고의 표현임을 고려할 때 초지능에 대한 인간적 표현은 ‘거룩’이 적절하다고 본다. 낙심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며, 아플 때 공감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을 실현하는 거룩의 영성은 연산을 통하여 효율성만을 고려하는 초지능의 규범을 책임질 수 있는 과학 기술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3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공허한 구호만 있지 실제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한 현대 과학 기술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지능에 학습을 시켜서 입력값을 찾아내기 위하여 최적값을 스스로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보고, 기계도 자율과 영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컴퓨터 공학자들이 곧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데이터의 복제는 가능하겠지만, 기계의 부활을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뇌 기억을 복사하여 인간적 이미지로 전환한 홀로그램은 가능하겠지만, 그것을 우리가 믿는 영혼과 육체의 부활로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빅데이터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여 나가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다움’을 통한 ‘거룩’이란 기계론적 초지능을 제어할 수 있는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포함한 영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유토피아는커녕 디스토피아(dystopia)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덕성과 성화와 같은 기독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이와 같은 과제는 필연적으로 ‘인간 공동체의 책임’과 연관이 된다.

셋째, 교회 공동체가 4차 산업의 혁명 과정에서 중시하여야 할 점은 ‘공동체’성에 주목하여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인간 존재를 하나님과 같은 절대 존재도 아니요, 그렇다고 비존재도 아닌 중간의 어정쩡한 존재로 정의하였다. 그는 비록 인간 존재가 천상의 존재는 아니지만, 연약한 인간들이 하나 되어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공동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고하게 홀로 있는 것보다는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비록 불완전한 존재지만, 서로 의지하며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공동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4차 산업에서 만물 초지능은 점점 인간과 독립하여 마치 절대자처럼 스스로 독립하여 있는 것처럼 착각을 준다. 정작 인간은 초지능 로봇을 만들어 놓고도 어떻게 다룰지 고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이 하여야 할 일은 더욱더 공동체성을 강화하고, 덕과 성화를 실현할 수 있는 공공성의 담론을 증진하고, 기계론을 뛰어넘는 공공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사명에 대하여 영적으로 최적화되어 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서 아담의 진정한 파트너는 하와뿐이었다.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자연 만물이 도움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진정한 파트너는 될 수 없었다. 이는 인간 존재와 다른 피조물의 우열을 나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보고자 함이다. 가정을 주시고 친족을 주셨으며,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도록 이끌어주셨다. 가정과 국가 공동체는 인간 공동체가 추구하여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직시하여야 하며 특히 교회 공동체는 그 사명에 있어서 선두에 있다.

4차 산업혁명에 즈음한 인간성의 위기를 깨닫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나아가 맡겨주신 공동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의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종말론적 부활의 여정에 서 있다. 교회 공동체의 최고 목표는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요한복음 14:2~3). 따라서 이 땅의 모든 가치는 무익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진리의 세계에서 우리 크리스천은 산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 땅의 문명이 이룬 진보에 흥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공동체를 위하여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

초지능을 신의 자리에 두려고 하는 우상숭배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초지능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될지 함께 고민하여야 한다. 초지능의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하며 권력화하여 또 다른 지배를 꿈꾸지 말아야 한다. 초지능을 성적 도구화하여 욕망을 채우려는 성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 초지능을 군사 무기화하여 대량 살상의 터미네이터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초지능을 이용하여 저지능(?)의 인간을 압살하는 사기꾼 기계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책임은 우선 과학 공동체에 있으며, 이를 구성하는 인간 공동체에 그 몫이 있다. 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가치를 신장할 수 있는 거룩한 영성의 함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인재들을 배출하여야 한다. 기계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인간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교회 공동체의 살아있는 생명력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을 돌파할 수 있는 기독교의 영성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이 땅에서 얻을 수 없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우리에게는 초지능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며 우리의 모든 수고와 짐을 맡아주시지 않으셨는가?(마태복음 11:28 참고) 이 과학 혁명의 시대에 우리가 책임져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의 진정한 지혜가 되시며 힘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며 영성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이 시간 우리는 진정한 영적 개혁을 위하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루터의 양심은 당시 무소불위의 종교 권력에 맞서 말씀과 양심의 편에 서서 자신을 헌신하였다. 4차 산업혁명의 이 시기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그리고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사랑의 열정을 회복할 때임을 각성해야 한다. 산업혁명을 영적 각성으로 이끌어 나가는 교회 공동체의 생명력 회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기도한다.

유경동 교수 Ph. D.
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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