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 (3)
By Yoon-Jae Chang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 극복을 위한 교회의 선교 방안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니 지난 50년간 ‘사회 정의’(social justice)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던 경제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이 세계 곳곳에서 정의를 향한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사상의 기초를 놓은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개인적 자유(individual liberty)와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사명은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에게—이들의 다수가 종교인들인데—톡톡히 창피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에게 ‘사회’란 인간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자생적 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이렇게 사회적 정의를 전면 부정한 하이에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서구 사회가 자꾸 경제적 평등과 복지를 말한다고 비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이웃 사랑 윤리를 전근대적 부족 사회 윤리로 폐기 처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사상이 지구촌을 휩쓸고 간 지난 50년간 세계 곳곳에서 정의를 향한 외침이 들려온다. 그 외침은 하늘을 향한 외침이다. 그 외침은 하나님마저 떠나버린 것 같은 밑바닥 상황에서 가난한 자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절규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Moltmann)은 이렇게 절규로 가득 찬 세계는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안에 사는 우리 역시 죄에 연루되어 있다고 고발한다.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양분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강자와 약자를 분리해 놓은 정치적 체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연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동식물의 다양한 종을 매년 감소시키고 있는 인간 사회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를 희생시켜 가면서 현재를 즐기고 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의 잘못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체제는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안에서 먹고 일하고 사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지금 생명의 하나님께서 이 정의롭지 못한 체제 속에서 당신을 향해 울부짖는 절규를 들으신다. 지금 평화의 하나님께서 이 땅의 가난한 자, 약자들에게 가해진 불의를 보고 계신다. 이 상황이 지금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 있는 ‘선교적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명하셨다(미가 6:8).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두’가, 즉 단 1%가 아니라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축복을 누리게 하는 일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자유주의 반세기 동안 일어난 지구촌 전체의 고통과 변화를 직시하며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설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 선교는 첫째로 교회의 ‘자기 부끄러움’에서 시작하면 좋겠다. 교회가 경제적 불의에 가담한 죄책을 고백하는 운동으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청빈(淸貧)이 아니라 청부(淸富) 하나님의 뜻이라며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성공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ity)을 참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사실 ‘부끄러움’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큰 정의의 덕목이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말로 정의를 설명했다. 수오지심이란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기 잘못을 성찰하는 양심이다.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이요,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오늘날 세상의 위기는 바로 이런 마음의 위기다. 공직자란 사람들이 공직에 취임하여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시뻘건 사욕을 추구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한때 세계 최대 컴퓨터 제조 회사였던 휼렛 팩커드(Hewlett-Packard)에서 퇴임한 CEO 레오 아포테커는 11개월 동안의 회장직 재임 기간 중 회사 주가를 50% 가까이 떨어뜨렸는데도 155억 원의 거금을 퇴직금으로 거머쥐고 물러나면서도 한 줌 부끄러운 줄 몰랐다. 2008년 월가 위기로 온 세계를 도탄에 빠뜨린 금융계 CEO들의 연봉은 천문학적 수준인데 미국의 청년들은 일류 대학을 졸업해도 학자금 대출로 수만 달러 이상의 빚을 지고 때론 아침마다 끼니 걱정에 시달려야 한다. 그런데도 미국 전체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의 상위 1%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한자로 이런 것을 ‘무치’(無恥)라고 한다. 얼굴이 두터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름을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경제 문제를 신앙 문제로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을 불러온 경제 신자유주의 사상에 스스로 포섭된 것을 정말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일부 교회들이 아예 신자유주의적 전략을 목회에 도입해 대형 교회로의 성장을 시도했다. 설교와 프로그램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대형 기업처럼 성장했다. 기독교 서원, 인터넷 쇼핑몰, 케이블 방송 등 기독교 관련 사업을 매입하고 이 규모를 기반으로 지성전 체제 등을 구축해 국내외적 팽창을 시도했다. 설교를 통해 현재의 경제 체제를 긍정하고 교인들이 그 안에서 성공하여 자선을 베푸는 계층이 될 것을 권유하면서 부의 양극화와 무한 경쟁으로 무너지는 사회 공동체에 관심을 쏟기보다 개인과 자기 가족의 행복 추구에만 집중하게 했다. 교회는 점차 물량주의화, 대형화, 브랜드화가 되면서 교회의 본질을 잃어갔다. 교회는 맘몬을 섬긴 죄를 참회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 곧 돈의 신]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누가복음 16:13)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 선교는 ‘공적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 되면 좋겠다.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가난한 자’를 우리의 무책임으로 인한 수치로 부끄러워하는 운동이 되면 좋겠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26:11, 마가복음 14:7, 요한복음 12: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로부터 가난은 임금도 구제 못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무한한 탐욕과 이기심 속에서 이웃을 제도화된 가난 속에 영구히 방치하는 인간의 경제를 향한 질타 말씀이다. 이 땅에 가난과 절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은 건강하고 또 열심히 일하려 해도 가난해지는 시대다. 신자유주의 이후 빈곤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한국에서는 반복 빈곤층까지 포함해 국민의 약 30%가 빈곤의 고통에 시달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청년 실업의 문제 그리고 노인 자살의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 권리’를 부끄러운 것인 양 이야기한다. 그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으로 치부한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하나님의 정의라는 따뜻한 정의와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 선교는 성서가 말하는 ‘희년 사상’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것에서 큰길을 열 수 있다. 성서에서 희년(禧年, Jubilee), 곧 ‘기쁨의 해’는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지낸 다음 해를 말한다. ‘속죄의 날’에 뿔 나팔 소리와 함께 희년이 선포되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이 선물처럼 주어진다(레위기 25:10). 사람들은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간다. 희년에는 농사를 지어서도 안 된다(레위기 25:11). 땅은 투기의 대상일 수 없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다만 땅 위에 나그네일 뿐이다(레위기 25:23). 무엇을 사고팔 때 이웃을 억울하게 해서도 안 된다(레위기 25:14). 세나 이자도 금지하였고(레위기 25:37), 빚도 무조건 탕감하였다. 식객과 종으로 타향에 팔려 간 사람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낸다(레위기 25:41). 이런 희년법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사회상, 곧 권력자와 부자의 횡포와 채무자들의 극에 당한 궁핍과 노예와 농노들의 반란 등 이스라엘 사회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분열되었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런데 레위기에서 선포된 이 희년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근간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통해 당신의 ‘선교 사명’(mission statement)을 이렇게 선포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주의 은혜의 해’(The Year of Lord’s Favor)가 곧 ‘희년’이다. 예수께서는 놀라서 자신을 쳐다보는 회중을 향해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누가복음 4:21)고 말씀하셨다. 희년이 지금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50년마다 손꼽아 기다리던 희년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씀이다. 주기적으로 역사의 모순을 극복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계약 공동체를 새롭게 회복하려는 희년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사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주의 은혜의 해는 50년마다 기다리는 어떤 특별한 행사가 아니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이루어지는 현재의 사건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이 희년을 오늘날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로 이해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미국의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Herman E. Daly)는 구약 성서의 희년 사상을 현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한 아이디어를 던졌다. 성서의 희년을 지나친 사회 양극화를 막는 대원칙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데일리에 의하면 희년 사상은 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고질적인 부의 불평등 문제를 사회적으로 관용할 수 있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제한하는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목표인 희년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성서의 희년 사상에서 그는 지금의 ‘무제한적 불평등’으로부터 ‘제한적 불평등’으로 전환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 오늘날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시달리는 인류 경제를 위해 성서가 주는 커다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평등의 제한을 강조하는 희년 원칙이라고 데일리는 주장한다. 물론 그는 이 고대 이스라엘의 희년법이 우리 시대에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희년법이 가지는 ‘제한적 불평등’이라는 원리는 오늘날 부와 소득에 있어서 일정한 최고 한계와 최저 한계를 정하는 정책으로 제도화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간략히 말해, 최고 소득과 최저 소득의 한계를 제도로 정함으로써 ‘너무 가난하거나, 혹은 너무 부유한’ 양극단을 피하자는 것이다. 데일리에 의하면, 이와 같은 정신은 구약과 복음서만이 아니라 신약 성서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에도 사도 바울에 의해서 잘 표현되고 있다. 바울은 구약 성서에서 출애굽 광야의 만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평형’(균등, 공평, 혹은 equality)을 이렇게 강조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출애굽기 16:18] 한 것과 같습니다.
세계 교회도 이런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경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적극 연대하고 있다. 2006년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제9차 총회를 통해 경제 문제가 곧 신앙 문제이며, 경제적 불의에 관한 관심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정당한 교회의 관심사임을 천명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빈곤선’(poverty line)의 문제만이 아니라 ‘탐욕선’(greed line)의 문제도 중요한 신앙 의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빈곤선’ 이하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탐욕선’은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으로 그 한계선을 설정해보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경제 양극화와 극단적 불평등으로 신음하는 인류를 살릴 수 있는 지혜와 원리와 비전이 무궁무진하게 있다.
장윤재 Ph.D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Contact Us for Help
View staff by program area to ask for additional assist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