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의 시대, 공생을 생각하는 교회 (2)
By Il Joon Park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종교의 의미,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의미란 무엇일까,’ ‘교회란 무엇이어야 할까,’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할까’를 묻게 된다. 사실 질병의 발발보다 우리가 알아 왔던 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심리적 충격이 팬데믹 이후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이 심리적 여진 앞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공멸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감수성과 감성의 분극화 그리고 중추 신경계의 자가 절단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시대, 감염 위험으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자택에 반 격리되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가 그나마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네트워크망 덕분이다. 네트워크 연결망 덕택에 우리는 비교적 접촉의 빈도를 줄이면서 언택트, 즉 비대면으로 관계와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캠퍼스에 모여서 수업을 할 수 없게 된 대학들은 일찌감치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해서 사이버 캠퍼스를 구현 중이다. 처음 비대면 수업을 접한 교수와 학생들은 당혹스러웠지만, 생각보다 빨리 디지털 네트워크의 언택트 환경에 적응해 나아갔다.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스마트폰 등의 사용에 낯설기는커녕 친숙했던 탓이다. 아마도 이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서 만남과 활동을 연장(extension)해 나아가는 모습은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점점 증가했을 것이지만, 팬데믹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해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 마트나 시장에 가는 대신 인터넷으로 배송을 주문한다. 택배 시장은 팬데믹으로 인해 가속 성장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음식 배달 시장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사물 인터넷과 3D 프린팅 기술이 본격적으로 접목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기호 자본주의 체제는 날개를 달 것이다. 인공 지능을 활용한 원격 진료 분야 등이 상용화되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제4차 산업 혁명이 본격 궤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대신에 할 로봇 산업도 착실히 성장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접촉(contact)의 시대에서 접속(connection)의 시대로 전환되면서 낙관적인 변화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연대의 시대에서 연결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에게 감수성(sensibility)과 감성(sensitivity)의 분극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감수성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고, 감성은 외부 대상에 대한 정보 처리 능력을 가리킨다. 본래 오감을 활용하여 타자와 세계를 만나면서, 인간은 타자에 대한 공감과 정보 처리 능력이 하나로 통합되어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비대면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이 도입되면서, 화면과 영상을 통해 접하는 대상과 상황에 대한 정보 처리 능력은 그대로 유지되는 반면, 대면 접촉 상실로 인해 오감을 통해 그들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 중 특별히 시각과 청각을 통해 정보를 처리하게 된다. 실시간 만남에서 미묘한 뉘앙스와 숨겨진 속내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후각과 촉각 등이 정보 처리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정보 처리 능력은 활발하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 능력은 떨어지는 상황, 즉 감수성과 감성의 분극화가 초래되는 것이다.
접속의 시대에는 감수성과 감성의 분극화가 초래된다.
무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의 분노가 발산의 출구를 찾아 격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분노의 출구를 찾는다. 쉽게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마녀사냥하고, 악마화하는 일이 더욱 잦아진다. 아울러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경쟁 체제에서 ‘공정성’을 정의(justice)의 유일한 절차로 배워온 세대는 우리 시대의 루저(loser), 즉 패자들을 향해 경멸과 혐오의 감정을 쏟아낸다. 바로 그들의 모습 속에서, 자기 스스로에게서 정말 보고 싶지 않은 패자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을 향한 혐오 감정은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무한 경쟁 시대에 필연적으로 언젠가 패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감정적 반발이다.
새로운 미디어가 우리의 문화와 관계 양상을 바꾸어가는 전환기에는 인간의 중추 신경계가 자가 절단(autoamputation)을 시도하여 ‘감각 마비’를 야기한다고 마샬 맥루한은 언급한 바 있다. 맥루한에게 미디어는 인간의 연장(extension)이다. 인간이 미디어 매체를 통해 더 넓게 연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 안의 주체나 자아가 ‘확장’되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물론 미디어를 통한 연장으로 인해 인간의 관계와 활동 범위가 확장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인간 자아나 주체의 확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연장되면서 인간의 중추 신경계는 자신의 자아를 미디어 네트워크와 더불어 새롭게 재편하게 된다. 따라서 확장이 아니라 연장이다. 문제는 기존의 중추 신경계(the central nerve system)는 기존 경계에 조율이 되어있기 때문에 미디어를 통한 연장이 발생하면 중추 신경계가 자아를 인식하는 데 혼동이 발생한다. 이 혼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중될 경우, 중추 신경계는 자가 절단을 시도하여 자아를 보호하려 하고, 이는 연장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맥루한에게 미디어란 매스 미디어 매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기술적 양상들이 ‘미디어’다. 미디어란 ‘매개’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것들을 매개하여 연결하는 것 말이다. 언어는 그 표현을 통해 인간을 연결한다. 바퀴는 이족 보행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고 더 멀리 이동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연결한다. 철도는 대량으로 원거리의 사람들과 물자들을 연결하여 교류케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맥루한에게는 미디어였다. 미디어가 인간의 연장이라는 말은 인간은 기술과 문명을 통해 자신의 중추 신경계를 다른 존재들과 사물들로 연장해 가면서, 자신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급속한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미디어가 문화에 도입되면서 우리의 중추 신경계가 새로운 미디어에 적응하는데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을 경우, 감각 마비를 일으켜 자신의 연장을 타자(the other)로 인식하는 감각 마비가 발생한다. 맥루한에 따르면, 나르시스 신화는 바로 이 자가 절단과 감각 마비 현상을 예증하는 신화다. 나르시스는 연못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다 스스로에 도취하여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르시스는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타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자신을 타자로 착각하는 감각 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팬데믹의 비대면과 자가 격리 기간은 자가 절단에 의한 감각 마비를 최악의 모습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을 충분히 보인다. 우리의 정치적 참여는 칼 슈미트의 정치 신학 원칙을 따라 정치적 마니교로 전락하고 있고, 제도권 정치는 그렇게 사회의 분열을 먹이로 삼아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며 연명하고 있다.
박일준 Ph.D
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
LID Leadership Journal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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