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주의와 교회 리더십
By In-Yong Lee
우리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에 이은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통해 교회가 탄생한 지도 근 이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교회는 큰 부흥과 변천, 계속되는 타락과 개혁, 죄 된 역사와 새로운 변화를 위한 노력으로 꾸준히 달려왔다. 또한 지속적인 선교 활동으로 세계 방방곡곡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예수님의 복음을 실제 삶에 적용하고 생활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수많은 문제가 드러나고 지적되고 또 개선됐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러 가지의 차별주의가 그 한 예다.
인종차별, 성차별, 소득 격차에 따른 차별, 동성애 공포증, 학력 격차에 따른 차별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다. 고정 관념, 소문, 몰이해한 발언 등의 교묘한 차별적 행위; 희생양 만들기, 경멸적 언사, 비웃음, 사회적 기피, 비인간적인 대우 등의 편견적 행위; 고용에서의 차별, 사회적 배제, 주거지 차별, 교육 기회의 차별 등 구조적 차별; 폭행, 테러리즘, 훼손, 기물 파손, 협박 등의 폭력적 행위; 살인, 강간, 방화와 같은 개인에 대한 극단적 폭력 행위; 마지막으로, 의도적이고 제도적으로 한 인종을 말살시키는 제노사이드에 이르기까지, 차별주의는 사회의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차별주의 행태가 교회 안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은 혹 사회가 일련의 문제성 있는 행태에 대해 눈을 뜨고 이를 개선해도 교회가 그것을 따라잡는 데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주님의 사랑과 정의의 목소리와 손과 발이 되어야 할 교회가 어떻게 해서 외부 사회보다도 더 오랫동안 죄에 눈을 감고 그것을 지속하는 걸까? 교회의 리더십은 차별주의와 관련하여 과연 어떤 역할을 해 왔을까? Martin Luther, John Wesley, Dorothy Day, Martin Luther King, Jr., Mother Teresa, Nelson Mandela와 같은 출중한 교회 리더들이 있어 온 건 사실이다. 그들의 신실하고 강인한 사역과 후대까지 계속되는 그들의 영향력은 가히 놀랍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문제성 있는 교회 지도력이 발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차별주의의 타파는 차별주의가 대변해 온 억압의 사회 구조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현재 북미의 교회들은 거의 60여 년 동안 쇠퇴를 경험하고 있다. 교인 수, 교회 출석률, 그리고 이제는 헌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하향길을 걷고 있다. 나를 포함한 개체 교회 목사들은 기도하며 궁구하며 해결책을 찾으려 애쓰지만, 교회를 다시 부흥시키고 성장시키기가 절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미 주류 교회들을 따라 10~15년 전부터는 남침례교회까지 그 세가 줄어들고 있다. Brian McLaren이나 Phyllis Tickle 같은 사람들은 개체 교회나 교단이 어찌해 볼 수 없는 대규모의 변화가 다가오고 있다고 예견해 왔다.
Phyllis Tickle에 따르면, 약 2000년 전에 “대변천”과 함께 기독교가 등장했고, 약 1500년 전에는 “대침체”와 함께 수도원 운동이, 약 1000년 전에는 “대분열”과 함께 가톨릭교회가, 그리고 500년 전에는 “대개혁(종교개혁)”과 함께 개신교가 등장했다.[i] 이상하게도 매 500여 년마다 말할 수 없이 큰 대규모의 변화가 기독교 안에 일어났다. 이 학자들은 지금 막 우리가 바로 그 500년의 문턱을 넘어서는 중이라고 힘써 말한다. 알다시피 우리는 2017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했다. 특별히 미국 사회에서 무엇보다 주목할 일은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인구 통계상의 변화다. 2042년이면 더는 백인이 주류가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색 인종이 절반을 넘게 될 것이다. 또 그보다 더 일찍 2019년이면 유색 인종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의 수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한다.[ii]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국 내 인종차별은 모든 다른 차별주의가 교차하는 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차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 온 시민운동가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그럼,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인구 통계상의 변화와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바로 모든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백인 우월주의가 판을 치기에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미 유색 인종의 투표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각종 방법이 사용되었다. 사진이 포함된 신분증명서를 요구하는 새 선거법들, 선거일 전 투표 일수 줄이기, 투표 당일 투표인 등록 받기 등이 그 예이다. 이 방법들은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소수 민족의 투표권 행사를 저지시키고 그들의 투표율을 떨어뜨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교회 안과 밖의 차별주의를 제거할 수 있을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건 기독교인들에게 차별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 차별주의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위배하는가를 알리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슨 일이 선행되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은 성서 해석에 대한 바른 이해다. 왜인가? 성서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독교인의 삶과 믿음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잘못된 성경 해석이 불러온 갖가지 재앙으로 가득하다. 이 재앙들을 타파하기는커녕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을 정당화하기에 바빴다. 정통 교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일어난 종교 전쟁들, 이단의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박해, 식민주의의 등에 업혀 들어가 원주민들을 짓밟은 선교 행각, 미국 내 흑인 노예제도의 죄악상 등 편협한 성서 해석이 가져온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위험과 해를 생각할 때, 더 올바른 성서 해석을 위한 노력은 참으로 시급하다고 하겠다.
서구 백인 남성 엘리트 중심의 성서 읽기는 현대(modernity)의 막판에 가서야 그 힘을 잃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은 객관성에 대한 지나친 신념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서야 그 객관성의 허상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의 예로, 1787년 J. P. Gabler는 “최신 신학 저널” (Neuestes Theologisches Journal)의 편집자 취임사 중에 “분명하고 부정의 여지가 없는 보편적인 지식”으로 정제된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성서 신학의 태동을 선언했다.[iii] 19세기 말에 활동한 William Wrede도 신약학은 “아무런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은, 지식을 향한 순수한 관심”으로 진행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역사적인 객관성 자체만으로” 그 방법론과 결과가 결정된다고 말했다.[iv] 신약학계의 이러한 객관성의 주장은 현재 대부분의 성서학자와 조직신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
전혀 “사심이 개입되지 않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고, 또 주변 문화에 좌우되지 않는” 성경 읽기는 그 자체로 잘못된 가정이라고 지적하면서, Stanley J. Grenz는 “중립적 성경 읽기라는 것은 없다”라고 주장했다.[v] Ellen T. Charry도 “성서 해석은 역사적, 문화적, 또 해석자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와 동떨어져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석학은 성서 본문과 해석자가 서로에게 말하고 서로에게서 듣는 상호적인 과정이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주장들은 Stanley Hauerwas의 의견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성서가 제공하는 전통의 어떠한 하나의 해석도 최종의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vi]
남미 출신의 미국 신약학자 Justo L. González에 따르면, 성경 해석에서 관점을 배제할 방법이 없으며, 따라서 이 관점의 차이가 처음부터 뚜렷하게 인정되지 않으면, 하나의 특수한 관점이 보편성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 결과, 남성의 관점에서 본 신학이 인류 전체의 보편성을 대변하게 되고, 북유럽 백인 신학이 “정도”로 여겨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때 벌어지는 일은, 이른바 제삼세계 혹은 소수 민족의 관점이 중요치 않은 주변적 이론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vii] 여성 신학자들도 마찬가지 의견이다. Mary Ann Tolbert는 객관성과 그것이 정도임을 자처하는 권위적인 과거의 주장들은 “실제로 그들의 학문 연구에 영향을 끼치는 개인적 의도와 편견들을 철저하게 감추는” 일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학적,” “남미 여성의,” 또는 “제삼세계의”와 같은 형용사 없이 제시되는 기존의 해석을 모두 “가부장적 해석”이라 부른다.[viii]
그 결과, 최근의 학자들은 글의 서두에 자신들의 관점을 분명하게 밝힌다.[ix] 어떤 식으로든 객관성의 허구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양심의 발현이라 하겠다. 동시에, 다른 이들이 그와 같은 허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못을 박는 처사라고도 하겠다. 흑인 신학, 남미 신학, 여성 신학 등을 빗대어 신학을 분산시키는 요인들로 보는 비판에 대해 González는 힘주어 말한다. 여러 다른 관점에서 나온 신학들이 신학의 분산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전통적인 신학 전체가 사실은 특수한 배경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행위가 바로 신학을 분산시킨다는 말이다. 어느 신학도 특정한 관점에서 복음을 바라본 결과이며, 따라서 그들 중 어떤 신학도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x]
모든 성서 해석을 특정 관점에서 나온 산물로 여기는 것이 차별주의와 교회 리더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한 마디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성서가 던져 주는 다각의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어서 어느 특정의 사회 그룹(오랜 역사 동안 북유럽의 백인 남성 엘리트들이 그 자리를 독차지해 왔다)이 자신들의 처지에 용이하게 독단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불변의 진리로, 또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몰아붙이는 일을 막아 준다. 여러 사회 계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차별주의에 눈을 뜨고 그것의 근절을 위해 힘쓸 수 있다. 예를 들어, 흑인 신학을 통해 미국 내 인종차별주의의 현실에 눈을 뜨고 그 해체를 위해 일할 수 있고, 여성 신학으로부터 성차별의 폐단을 깨달아 알고 그의 말살을 위해 힘쓰게 된다.
Rowan Williams의 심오한 말대로, 인류의 역사는 “억압과 희생의,” “비난과 제외의” 역사이고, “상호 간 배척과 공포의 구조를 가진” 역사다. 한 마디로, 인류의 역사는 억압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로 일관해 왔다.[xi] 그 결과, 죄의식과 복수, 폭력과 보복의 끝없는 악마적 주기를 반복해 왔다. 이 주기를 뛰어넘는 길을 연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인류의 폭력과 배척의 희생양이 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 “인간의 판단을 판단하고,” “인간의 비난을 비난하는” 이로 돌아오셨다.[xii] 끊임없는 차별주의로 소수의 개인과 계층이 권력과 재산과 기회를 독차지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억압을 받는 이들의 의로운 폭력은 해방의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아니다. 폭력에 희생되었다 해서 나도 폭력을 행사하여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역할이 뒤집히는 데에 있지 않고, 폭력과 복수의 주기를 깨뜨리는 데에 있다. 억압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 자체를 초월하는 데에 있다. 사다리의 맨 밑바닥에 있던 사람들이 사다리 꼭대기로 가는 것이 해결이 아니다. 그 사다리 자체를 던져 없애버리는 것이 해결책이다. 차별주의의 타파는 차별주의의 수혜자들을 억압하고 피해자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주의가 대변해 온 억압의 사회 구조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교회의 리더십이 이 일에 앞장서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 세상에, 교회 안에 구현하는 일에 힘쓰는 날을 기대해 본다. 이것이 또 한 번의 대격변의 시간에 처해 있는 교회들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인용 목사
First United Methodist Church of Rutherfordton, NC
LID Leadership Journal 2019
[i] Phyllis Tickle, Emergence Christianity: What It Is, Where It Is Going, and Why It Matters (Grand Rapids, MI: BakerBooks, 2012), 17-21.
[ii] Frank Bass, “Census Bureau Says Minority Youth to be Majority by 2019,” Bloomberg, Dec. 12, 2012. Quoted in Mark DeYmaz and Oneya Okuwobi, The Multi-Ethnic Christian Life Primer (Little Rock, AR: Mosaix Global Network, 2013), 14.
[iii] J. P. Gabler, “An Oration on the Proper Distinction between Biblical and Dogmatic Theology and the Specific Objectives of Each,” translated in John Sandys-Wunsch and Laurence Eldredge, “J. P. Gabler and the Distinction between Biblical and Dogmatic Theology: Translation, Commentary, and Discussion of His Originalit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Vol. 33 (1980): 142-43. 이 에세이 내 한글 번역은 저자의 것임.
[iv] William Wrede, “The Task and Methods of ‘New Testament Theology,’” The Nature of New Testament Theology: The Contribution of William Wrede and Adolf Schlatter, ed. Robert Morgan (London: SCM Press Ltd., 1973), 73 and 70.
[v] Stanley J. Grenz with Noel Leo Erskine, “How Do We Know What to Believe?: Revelation and Authority,” Essentials of Christian Theology, ed. William C. Placher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 27.
[vi] Stanley Hauerwas, “The Moral Authority of Scripture: The Politics and Ethics of Remembering,” Interpretation: A Journal of Bible and Theology, Vol. 34, No. 4 (1980), 362.
[vii] Justo L. González, Santa Biblia: The Bible through Hispanic Eyes (Nashville, TN: Abingdon Press, 1996), 15-16.
[viii] Mary Ann Tolbert, “Defining the Problem: the Bible and Feminist Hermeneutics,” Semeia 28 (1983), 115.
[ix] 그 예로, 본 저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 교육을 받고,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기혼 여성이다. 또한 연합감리교회의 Elder 목사로 안수를 받고 백인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다인종 회중을 꿈꾸며 기도하며 씨름하는 중이다.
[x] González, 17.
[xi] Rowan Williams, Resurrection: Interpreting the Easter Gospel, 2nd edition (Cleveland: The Pilgrim Press, 2002), 18 and 11.
[xii] Ibid., 4 and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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